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



    어릴 적 나는 외딴 숲속에서 자랐다. 놀이터도 또래 친구들도 없었기 때문에 관찰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큰 집’으로 제사를 일 년에 열두 번이나 지냈다. 사슴을 여러 마리 키웠는데, 뿔을 자르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잔치를 열고 피를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주말에는 종종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불렀다. 이러한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의례적 요소들에 대한 경험은 나의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험은 재구성된다. 삶이 만약 하나의 각본이라면, 스스로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역할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험을 재구성하고, 기존의 삶과 틀을 뛰어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가상의 상황을 부여함으로써 주어진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집단 연극치료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각각의 서사는 연극의 형식인 '막(Act)'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트릴로지(Trilogy)로 연결된다.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2018, 예술공간 땅속)과 《죽은 민영이의 49재》(2018, space xx)에서는 한국 전통의 장례 형식을 따랐고, 《Dixit Dominus Domino Meo – 도미노, 숭배자들의 게임》(2020, 0 Gallery)에서는 옛 가톨릭 성가와 도미노 게임의 유래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학부 내내 유화 작업을 했었지만, 이 시기에는 다소 직설적이고 극적인 표현을 원했기 때문에 드로잉, 자수, 설치 등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실험했다. 사운드와 영상을 활용해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연출하고, 작품에 직접 향을 피우거나 손전등으로 비춰보는 행위를 유도하여 관람자와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였다.

    마치 사이코드라마에서 주인공뿐만 아니라 연출자, 보조 자아, 무대, 관객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나는 관람자가 전시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다. 이는 형식적 실험을 넘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피해자다움의 미신과 2차 가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나는 이러한 의례나 관객 참여와 같은 요소들이 단순한 표현에서 벗어나 타자화된 경험을 매개하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변혁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체감했다. 당시 경험한 치유와 연대, 예술인으로서의 효능감은 지금까지도 나의 작업에 가장 큰 목적이자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예술을 통해 경험한 가상의 죽음은 재현적이고 진술적이었던 자전적 서사에서 공동체적 내러티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 유사한 역사를 가진 별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초고밀도 중성자별의 탄생‘은 선형적이고 운명론적인 인과를 거부하고, 동시에 누구나 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별과 불, 나무, 우로보로스와 같은 상징적 기호들을 예로부터 신화적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온 보편적 도상이지만, 풍경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장면성을 부여받는다. 유화물감과 함께 흑연을 붓으로 비벼 고대의 삽화나 동굴벽화를 연상시키는 원시적인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그의 논문 「복제 기술 시대에서의 예술작품」(1936)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종교로부터 해방되면서 예배적 가치를 상실했다지만, 나는 ‘이미지’의 고전적이고 강력한 힘을 되찾고 싶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두려워하는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였던 과거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부정적인 사건이나 실패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가르침과 행동양식의 변화를 추동해온 신화의 기능을 계승함으로써 우리의 고유함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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